2013/08/07 (19:45) from 61.85.37.120' of 61.85.37.120' Article Number :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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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일기(解脫日記)  <131>
6년의 공백(空白)을 깨고
백화도량(白華道場) 문(門)을 다시 열며

해탈일기(解脫日記) <131>

2013년 8월 4일(日)

투명한 공기(空氣)가
온통 산 백합 향(百合香)으로 향기롭다.
흰 백합, 붉은 백합, 노란 백합...
꽃 나팔이 되어 세상(世上)을 향(向)해
팡파레를 울린다.


매미들의 계절(季節)이 돌아왔다.

여름의 한 가운데를 지나며
가슴까지 시원스레 씻어내는 듯
청량(淸凉)함으로
온 도량(道場)을 휘감아 울리는
매미들의 합창(合唱).

참매미, 말매미, 고추매미, 보리매미..
각기 다른 선율(旋律)로 노래함에도
너무도 멋진 코러스(Chorus)를 이룬다.

한 여름
매미들의 합창(合唱)을 듣노라면
가슴 뭉클한 감동(感動)이 밀려오곤 한다.
매미는 한 여름을 노래하기 위해
6~7년을 깜깜한 땅 속에서
유충상태(幼蟲狀態)로 기다린다는 것이...

법당(法堂) 탁자(卓子) 위에 놓인
법문(法門) 날짜와 제목(題目)을 적어둔
빛바랜 노트를 펼쳐본다.
2008년 8월 10일 마지막 법회(法會)가 열렸었다.
그리고...
2013년 8월 10일 새로이 법회(法會)를 연다.

지나간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도량 문(門)을 닫고
인터넷 창(窓)만을 열어 두었었다.

하늘의 시련(試鍊),
연단(鍊鍛)의 불을 통과(通過)하는
고난(苦難)의 날들을 지나왔다.

해탈 후(解脫 後)
모든 것이 완성(完成)된 것이 아니었다.
해탈지견(解脫知見)이 필요(必要)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과감(果敢)히 도량 문(道場門)을 닫은 것이다.

그렇게 6년의 세월(歲月)이 지났다.
‘아수라(阿修羅)와의 대 전쟁(大戰爭)’을 겪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도량 문(道場門)을 활짝 여는 것이다.

초기(初期)부터 함께 했던 수행자(修行者)들,
제자(弟子)들을 먼저 불렀다.

강산(江山)이 변(變)하는 세월(歲月)을 함께 했으니..
그렇기에 그 세월(歲月)의 두께만큼 신뢰(信賴)가 쌓여
전화 한통에 긴 세월(歲月)의 공백(空白)이 무너지며

마치 예전처럼
한주 법회(法會)를 하고
바로 그 다음 주(週)에 만났던 것처럼
6년 세월(歲月)의 벽(壁)을
반가움으로, 기쁨으로 훌쩍 넘어선다.

더 놀라왔던 건 같은 시기(時期)
먼저 도량을 떠났던 제자(弟子)가
강산(江山)이 변(變)하는 세월(歲月)을 거슬러
찾아온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에 개설(開設)된
도량소식(道場消息)도 까맣게 모르는 채
휴가(休暇)를 가는 길에 일행을 먼저 보내고 찾아왔다.

강한 이끌림으로...

도량입구(入口)에 서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업장(業障)이 드러났고
방문자(訪問者)를 확인(確認)하지 않은 채
법당(法堂)에서 기다리라 일러준
내 모습을 얼핏 보는 순간(瞬間)
뜨거운 열기(熱氣)가 가슴과 등줄기에 퍼지며
기쁨으로 가득 찼다고 띄엄띄엄 수줍게 말한다.

법운당(法雲堂)에
마주 앉아 얼굴을 확인(確認)하고서야
그의 도명(道名)이 생각났고
평소(平素)에 말수가 별로 없던
조용한 수행자(修行者)이던 것이 생각났다.

내 가슴으로부터도 반가움과 기쁨이
감동(感動)으로 샘물 솟듯 일어난다.

강산(江山)이 변(變)하는 세월(歲月)을 거슬러
도량소식(道場消息)을 통 몰랐음에도
그 스스로 이 시점(時點)에 찾아오도록
안배(按配)하신 섭리(攝理)가...
놀랍고 감사(感謝)할 뿐이다.

제자(弟子)들과의
오랜 기다림 끝의 해후(邂逅)를,
설레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기다리고 있다.

제자(弟子)들도 설레이기는 마찬가지다.
바비큐 파티를 준비(準備)해 온단다.
그때는 다들 결혼하지 않았었는데
이젠 대부분이 결혼(結婚)을 했고 아이들이 있다.

덕인당(德仁堂) 마당에서
우린 다락방을 만들었고
다락방 지붕위에 예쁜 조약돌을 박아
별을 볼 수 있는 공간(空間)을 만들었다.

‘별마당’이라는 이름의 작고 예쁜 공간(空間)을.
그곳에서 함께 별을 보았다.

함께 모여 앉아 키타를 치고,
내가 만든 노래를 함께 합창(合唱) 했었다.
은하수(銀河水)까지 보이는 밤이면
별이 쏟아져 내릴 것 마냥 아름다웠지.

덕인당(德仁 堂)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둥글게 모여앉아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했고
가끔 바비큐 파티도 했었다.

추억(追憶)은 아련함으로 피어오르고
별이 빛난다.


이전의 제자(弟子)들은
강산(江山)이 변(變)하는 세월(歲月)을
알고 지냈으니 의심(疑心)의 업장(業障)이 없다.
오랜 세월(歲月)동안 녹아졌으니...


그러나 새로이 인연(因緣)을 맺게 될
수행자(修行者)들은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물론 눈뜬 중생(衆生)이 있다면
인터넷 백화도량(Internet 白華道場)을 통해서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의 위치(位置)가 있을 것이고
두껍던, 엷던 의심(疑心)의 업장(業障)이 가릴 터이니...


새로이 참가신청(參加申請)을 한
소수(少數)의 외부수행자(外部修行者)들의
반응(反應)이 당혹(當惑)스러웠다.

의심(疑心)하고 경계(境界)를 풀지 않는
‘한번 가볼까? 이거 가도 괜챦은 거야?’하는
그리고 ‘한번 가줄까? 하는’오히려 고자세(高姿勢)?

그들의 속마음을 읽으며 어이없기도 했지만
그들의 입장(立場)에서는
‘충분(充分)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이해(理解)는 해본다.

워낙 사이비(似而非)도 많고,
돈이 얽히기도 하니까......


말이 나왔으니 분명(分明)하게 밝힌다.
돈벌이 하려고 도량 문(道場門)을 연 것이 아니다.

해탈 전(解脫前)
나는 돈을 벌수 있는 머리도 재능(才能)도, 건강(健康)도,
사회적(社會的)인 지위(地位)나 명성(名聲)도 가족(家族)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있었다.

돈에 욕심(慾心)이 있었고 돈을 벌려면
난 여전(如前)히 속세(俗世)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고,
성실(誠實)하게 열심히 돈을 벌었을 것이다.
지금쯤은 내가 바라고 계획(計劃)했던
세속적(世俗的)인 건전(健全)한 욕망(慾望)을
열정적(熱情的)으로 추진(推進)해
아마도 다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지으시고 이끄시는 창조주(創造主)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기를 명(命)하셨고
태중교우(胎中敎友)로
착실한 카톨릭신자(信者)로 살아왔던 나는

나를 위해
예비(豫備)하신 길이 어떤 길인지 조차 모른 채
창조주(創造主) 하느님께서 명(命)하시니
순종(順從)함으로 길을 떠났다.

불교(佛敎)를 접(接)해보지도 않았던 내가
해탈(解脫)을 하게 되는
기이(奇異)한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 돈을 위해 이 일을 한다는
오해(誤解)나 의심(疑心)은 거두길 바란다.

최소한(最小限)의
이 백화도량(白華道場)이 유지(維持)될 정도의 세금(稅金)과
텃밭을 일구는 노동(勞動)과 기도(祈禱)를 통한
일용(日用)할 양식(糧食)으로 살아가고 있다.

참가신청(參加申請)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도명(道名)이나 이름, 별명(別名),
아무것이나 자신(自身)을 표현(表現)할 수 있는 이니셜 같은,
어떤 것으로도 자신(自身)을 대표(代表)하는 것이면
신청(申請)이 가능(可能)한데,

어느 곳에서 오는지를 확인(確認)하는 것은
또한 기차(汽車)로 올 경우
석포역(石浦易)에서부터 백화도량(白華道場)까지
도량 차편이용(車便利用)이 가능(可能)한
시간대(時間帶) 인지를 알기 위함일 뿐,
어떤 구속력(拘束力)도 없다.

오랫동안
도량 문(道場門)을 닫았다가 여는 것이기에
또한 이곳이
오지(奧地) 산(山)속이라 장보기도 만만치 않아
혹 음식(飮食)이 모자랄까, 잠자리가 불편(不便)하지 않을까
우려(憂慮)하여 미리 파악(把握)하는 것 뿐이다.

이후에도
참가 시(參加時) 미리 신청(申請)은 해야 한다.
앞으로 사람이 많아지면
숙식(宿食)을 원활(圓滑)히 해결(解決)해야 함으로.

교적(敎籍)같은 어떤 기록(記錄)도 없다.
들고나는 곳이 자유(自由)로운 곳이기에...

십여 년을 함께 했던
제자(弟子)들의 기록(記錄)조차 없다.
서로 연락(連絡)을 주고받는 전화번호(電話番號) 말고는.

이번에
참가신청(參加申請)한 수행자(修行者)들도 마찬가지 이다.
자신(自身)이 원(願)하지 않으면
참가신청 시(參加申請時) 받아두었던
임시기록(臨時記錄)조차 파기(破棄)한다.


이번 경우(境遇)는
무려 6년가량 도량 문(道場門)을 닫았다가
다시 여느라 오랜 제자(弟子)들에게만
미리 연락(聯絡)을 한
예외적(例外的)인 상황(狀況)이고,

도량에서 공적(公的)으로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連絡)해
오라니 가라니 하는 일은 없다.


법회(法會)
날짜와 시간(時間)을 알리는 것은
인터넷도량의 공지(公知)란을 통해 한다.

참가비용(參加費用)도
미리 따로 받는 것은 없다.

법회 후(法會後)
법시(法施)가 이루어졌으니
형편대로 나름의 재시(財施)를 하면 된다.

그 재시(財施)를 통해 도량이 문(門) 닫지 않고
어느 정도 유지(維持)가 될 수 있으니까.


직접 법회(法會)에 참석(參席)치 않더라도
인터넷 백화도량을 통해 수행(修行)하기를.
질문(質問)도 안부게시판에 글을 남기면
최대한 성실(誠實)하게 답(答)해준다.

어떤 것도 막아두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자유(自由)롭게
누구라도 보고 퍼갈 수 있도록 열어 두었다.

회원가입(會員加入)이나
돈을 요구(要求)하는 것은 일체 없다.
누구라도 자유(自由)롭게 드나들 수 있다.

기존(旣存)의 블로그들처럼
이웃신청도 하고 이웃신청도 받고 한다.
초, 중, 고등학생부터
다양(多樣)한 연령층(年齡層)이 방문(訪問)함으로
청소년에게 유해(有害)한 것이 아니면
서로 이웃신청에는 대부분 다 응(應)한다.


혹 도량 블로그인데
음악, 미술, 요리... 순정만화에 자장가까지
뭐가 이렇게 많이 올라있나 하고
눈살을 찌푸릴 수행자(修行者)도 있겠기에
오해(誤解)를 풀겸 잠시 이야기 하겠다.

백화도량(白華道場) 블로그를
처음 시작(始作)할 때는
도량에 관련된 자료(資料)들만 올렸었다.

어느 날, 우연히 발자국을 보고 답방(答訪)한
한 소년의 블로그에서
소년이 자살(自殺)을 예고(豫告)하고 있었다.

소년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고...

외톨이인 그 소년처럼
자살(自殺)을 생각할지도 모르는
다른 어린 소년소녀들에게도

그리고 나이가 적든, 많든
별 교류(交流)가 없이
무료(無聊)하고 고독(孤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위로(慰勞)가 되는 공간(空間),
정서적(情緖的)으로나마 여유(餘裕)를 줄 수 있는
그런 공간(空間)을 만들어 주고 싶어

내가 만든 음악(音樂)과
내가 그린 그림들을 먼저 올리고
차츰차츰
아름다운 음악이나 미술, 사진 등을 퍼날랐다.
고맙게도 좋은 자료(資料)를 나누어주는
좋은 님들이 꽤 있었기에...

나 자신도 화가(畵家)였던 적이 있었기에
좋은 작품(作品)들을 만나면 여러 사람들과
공유(共有)하게 해주고 싶어서
또한 그 화가(畵家)의 재능(才能)도 빛내주고 싶어서...

그러한 재능기부(才能寄附)가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純化)시키고,
아름답게 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마음을 위로(慰勞)할 수 있다면,

당장 눈에 보이는 돈으로 환산(換算)이 되지 않더라도
재능(才能)을 주신 창조주(創造主) 하느님께서
그의 재능(才能)에 재능(才能)을 더하시고
축복(祝福)해주시지 않겠는가.


그렇게 시작(始作)을 했고
젊은 엄마들이 육아(育兒)로 바빠
블로그 개설(開設)만 하고..
발자취를 남겼기에 그 엄마와 아기들을 위해
자장가를 구(求)해 올려두었다.

제자(弟子) 하나도 아기를 키우느라 애쓰기에..

이런 이유(理由)들이 하나 둘 모여
도량 블로그가 음악, 미술, 사진..
자장가에, 순정만화까지
다양(多樣)하게 구비(具備)가 된 것이다.^^


물론
인터넷 백화도량(白華道場)의 핵심(核心)은
진리(眞理 skt. Dharma)이다.



♡ Living Buddha
인터넷 백화도량(白華道場)
Internet Baegwha Doryang 을 통해

도량(道場) 문(門)을 활짝 열어

목마른 이 누구든
진리(眞理)의 샘, 지혜(智慧)의 샘물을
마실 수 있도록 개방(開放)했다.

다른 사적(私的)인 목적(目的)은 없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
Matthew 10:8


예수님의 사랑이
법신불(法身佛)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내 안에 함께 하기 때문이다.


발자국을 남긴 벗들에게는
서로 이웃을 신청(申請)했고

서로 이웃을 신청(申請)한 벗들에게도
성실(誠實)함으로 응(應)한다.

서로 이웃이 되어준
좋은 벗들을 위해......

항상(恒常) 기도(祈禱) 중(中)에
기억(記憶)한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벗들을 위해서도......
발자국을 남기든, 남기지 않든


찾아오는 모든 벗들이

창조주(創造主) 하느님
법신불(法身佛) 하느님의

지혜(智慧)와 진리(眞理)의 빛으로
충만(充滿)해지고

그 크신 완전(完全)한 사랑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거룩한 파동(波動) 안에 머물러

치유(治癒)와 위로(慰勞)로
넘치어 돌아갈 수 있기를
축복(祝福)한다.


아무런
조건(條件)도 사심(私心)도 없다.

불신(不信)의 시대(時代)를 지나고 있지만......

불신(不信)을 넘어서
성실(誠實)한 벗, 신실(信實)한 벗,
참된 벗으로 남고 싶다.

내가 그러하면
내 벗 또한 그러할 것이니......


종교(宗敎)의 벽(壁)이 높은 고(故)로
그 왜곡(歪曲)과 갈등(葛藤)의 골이 깊은 고(故)로

오해(誤解)와
경계(警戒)의 소지(素地)가 있음을
당연(當然)히 이해(理解)한다.


분명(分明)히 밝힌다.

기존 종교(旣存宗敎)의
왜곡(歪曲)과 변질(變質),
교의(敎義), 도그마(Dogma)의 독단(獨斷)으로

진리(眞理)의
왜곡(歪曲)된 해석(解釋)과 강요(强要)를
질타(叱咤)하지만......


난 여전히 신자(信者)이다.

천주교(天主敎)의 틀에,
기독교(基督敎)의 틀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예수님(Jejus Christ)의 가르침을

진실(眞實)하고 성실(誠實)하게
따르고 실천(實踐)하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다.


불교(佛敎)의 틀에도
들어가 있지 않지만

석가모니 부처님(釋迦牟尼佛)의 가르침을

진실(眞實)하고 성실(誠實)하게
따르고 실천(實踐)하는
불교인(佛敎人 Buddhist)이다.


유교(佛敎)의 틀에도
들어가 있지 않지만

공자님(孔子)님의 가르침을

진실(眞實)하고 성실(誠實)하게
따르고 실천(實踐)하는
유교인(儒敎人 Confucian)이다.


그렇다면 혹(或)
새로운 통합종교(統合宗敎)를
만들려하지 않는가? 하는

사이비적(似而非的)인 관점(觀點)의
의혹(疑惑)과 의심(疑心)의
오해(誤解)는 버려라.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關心)도 없다.
새로운 종교(宗敎)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주(主)여,
저에게 진리(眞理)를 주소서.


진리(眞理)가 아닌 것은
칼날처럼 찍어버리소서’


기도(祈禱)하며......

지금까지
광풍(狂風)과 맞서 싸우며
거친 광야(曠野)를 거슬러
비장(悲壯)함으로 걸어온 여정(旅程)이다.


오직 바람은
새로운 종교(宗敎)를 만들자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교(Christ 敎)의 창조주(創造主) 하느님
불교(佛敎)의 법신불(法身佛)
유교(儒敎)의 상제(上帝)
이슬람교(Islam 敎)의 알라(Allah)


무엇이라 감(敢)히 부르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창조주(創造主) 신(神)께서

인간(人間)에게 주신
진리(眞理)를 복원(復元)하고 바로 세워

창조주(創造主)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으로부터
유출(流出)되어 내려오는

지혜(智慧)의 빛으로 차고 넘쳐
그 거룩한 빛 속에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32. 대인 송(大人頌)


하늘과 땅은 나의 덕(德)입니다.
해와 달은 나의 밝음(明)입니다.

우주(宇宙)의 운행(運行)은
나의 흐름입니다.

우주(宇宙)의 기운(氣運)은
나의 길(吉)함입니다.


무한(無限)한 우주(宇宙)와 나는
하나(合一)입니다.

1994. 4. 13. 한티 白華佛 詠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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